
가산 아울렛 매장에서 마주친 반집업 아노락의 첫인상
가산디지털단지 근처 W몰이 문을 닫은 뒤로는 그 옆에 있는 현대아울렛 쪽으로 종종 퇴근길에 들르곤 한다. 딱히 살 게 없어도 한 바퀴 돌다 보면 계절 바뀌는 게 몸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에도 특별히 뭘 사려던 건 아니었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불면서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니까 가볍게 걸칠 만한 아우터가 필요해서 스포츠 매장들을 돌아다녔다. 원래 내 머릿속에 있던 건 매번 가을마다 입던 검은색 코오롱스포츠여성바람막이나 조금 더 가볍게 막 입을 수 있는 얇은 나이키여자바람막이 같은 흔한 앞 지퍼 형태의 옷이었다. 그런데 아디다스랑 데카트론 매장을 지나다가 유난히 마네킹이 입고 있던 베이지색 아노락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여유 있는 오버핏이었는데, 매번 입던 집업후드 스타일이랑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마침 그날 입고 갔던 일자형 청바지에도 대충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매장 안으로 홀린 듯이 들어가서 피팅해 봤다. 예전에는 반집업 아노락이라는 옷 자체가 입고 벗기 불편해 보여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날따라 유독 깔끔하고 예쁜바람막이처럼 보였던 것 같다. 피팅룸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서 소매도 올려보고 지퍼도 위아래로 조절해 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일반적인 집업 바람막이와 아노락 중에서 고민했던 지점들
하지만 매장에서 지갑을 열기 직전까지 고민이 꽤 길어졌다. 아웃도어 성향이 들어간 의류는 한 번 사면 유행 타지 않고 몇 년은 입어야 뽕을 뽑는데, 보통 자주 손이 가는 건 역시 앞부분이 완전히 지퍼로 열리는 바람막이나 가벼운 겨울조끼 종류이기 때문이다. 아노락은 태생적으로 머리 위로 옷을 뒤집어써서 입고 벗어야 하니, 출근길에 기껏 공들여 만진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거나 목 깃 부분에 비비크림이 묻을까 봐 걱정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매장 직원분은 요즘 여성맨투맨티셔츠 대용으로 이런 얇고 바스락거리는 나일론 아노락을 단독으로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며 지금 사두면 늦가을까지 입는다고 옆에서 열심히 부추겼다. 그렇지만 유행이라는 말만 믿고 샀다가 몇 번 입지도 않고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둔 옷들이 이미 내 방 행거에 한가득이라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매장 한쪽에 걸려 있던 일반적인 나이키여자바람막이 기본형 모델이랑 이 반집업 바람막이를 번갈아 입어보면서 거의 20분 동안 거울 앞에서 서성였던 것 같다. 결국 맨날 입던 지퍼 형태는 집에 두 개나 있으니까, 조금 색다른 걸로 기분 전환이나 해보자는 생각에 아노락을 최종 선택했다. 결제 가격은 원래 정가에서 이월 할인을 조금 받아서 8만 원 중반대 정도였다.
8만 원대 지출 후 일상에서 3주간 입어보며 느낀 착용감
집으로 들고 와서 본격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입기 시작했을 때, 처음 일주일 정도는 생각보다 꽤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버스 타러 나갈 때 약간 쌀쌀하다 싶으면 안에 얇은 기본 티셔츠 한 장 입고 그 위에 툭 뒤집어쓰고 나가면 바람막이 역할을 아주 제대로 해냈다. 재질 자체가 바람을 잘 막아주는 탄탄하면서도 바스락거리는 나일론이라 가벼웠고, 옷 밑단에 달린 고무줄 스트링을 쭉 조여서 허리 라인을 살려 입으니까 다리가 길어 보여서 실루엣도 마음에 들었다. 낮에 기온이 조금 올라가서 후텁지근해지면 목 부분의 반집업 지퍼를 쇄골 아래까지 시원하게 내리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대충 걷어붙이면 스포티하면서도 힙한 느낌이 났다.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추워질 때도 가방에서 슥 꺼내 입기 좋았다. 두꺼운 여자패딩이나 무거운 가디건을 들고 다니기에는 애매하고 거추장스러운 요즘 같은 계절에 딱 적당한 두께감이었다. 주말에 집 앞 공원으로 가벼운 산책을 나갈 때도 그냥 이것만 대충 입고 나가면 되니까 세상 편한 옷을 찾았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화장실을 가거나 실내에 들어갔을 때 번거로워지는 순간들
하지만 2주 차로 접어들면서부터 매장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 반집업 아노락의 실전 단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귀찮아지는 순간은 실내외 온도가 차이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주말에 친구를 만나러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갔는데, 실내가 히터를 틀어서 꽤 후끈했다. 더워서 옷을 벗으려고 보니 아노락은 앞이 완전히 열리지 않으니까 만원 지하철에서 내리듯 끙끙대며 머리 위로 옷을 벗어 던져야 했다. 머리를 묶고 나간 날이었는데 머리칼이 정전기 때문에 사방으로 뻗치고, 입술에 발라둔 틴트가 옷 깃 안쪽에 살짝 쓸려 붉은 자국이 남았다. 화장실에 손 씻으러 갔다가 거울을 보니 목덜미 부분에도 베이지색 원단에 허얗게 화장품 자국이 묻어 있어서 어찌나 당황스럽고 민망했는지 모른다. 일반적인 집업후드라면 그냥 지퍼만 가볍게 내려서 의자 등에 걸쳐두거나 어깨에 대충 걸치고 있으면 그만인데, 아노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들썩이며 허우적대며 벗어야 하니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옆구리 쪽에 트임 지퍼라도 달려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내 옷은 일체형이라 벗을 때마다 요가 자세를 취하듯 온몸을 비틀어야 했다.
맨투맨 티셔츠를 입을 때와는 또 달랐던 코디의 애매함
여기에 코디를 맞춰 입는 난이도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처음 살 때는 슬랙스나 스커트, 청바지 아무 데나 다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상에서 흔히 입는 여성맨투맨티셔츠는 면 소재의 차분함 덕분에 대충 슬랙스에 입어도 캐주얼 오피스룩처럼 소화가 되지만, 아노락은 특유의 광택과 바스락거리는 나일론 질감 때문에 하의 매칭이 잘못되면 정말 동네 약수터에 운동하러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딱 좋았다. 청바지에 입어도 가끔 핏이 어정쩡하면 등산객 같은 느낌이 났고, 그렇다고 맨날 레깅스나 트레이닝 바지에만 받쳐 입자니 출근할 때 입고 가기에는 너무 성의 없어 보여서 옷장에서 이 옷을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는 날이 늘어났다. 야상점퍼처럼 지퍼를 완전히 열어서 이너 레이어드로 포인트를 줄 수도 없고, 단독으로만 상체를 다 덮어버리니 상체 덩치가 평소보다 더 부해 보이는 느낌도 들었다. 결정적으로 배 쪽에 있는 앞주머니에 스마트폰과 에어팟을 집어넣으면 주머니가 아래로 축 처지면서 아랫배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처럼 보여 핏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도 큰 문제였다.
여전히 옷장 앞을 서성이게 만드는 아노락의 활용도
3주째에 접어든 지금은 옷장에 걸려 있는 이 아노락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꽤 복잡해진다.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날씨 앱을 확인하고 바람이 많이 분다 싶으면 이 옷에 손이 먼저 갔다가도, ‘오늘 점심 먹을 식당이 좁은가?’, ‘오늘 화장 상태는 어떤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실내에서 옷을 벗을 때 겪어야 하는 그 구차한 순간들과 엉망이 될 머리 모양을 감당하고서라도 입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차라리 돈을 조금 더 보태서 그냥 편하게 썼다 벗었다 할 수 있는 바람막이나 가벼운 여성야상점퍼를 살 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디자인 자체는 정말 트렌디하고 예쁜데, 옷이라는 게 디자인보다 일단 내 일상 속 행동 패턴과 맞아야 자주 입게 된다는 아주 단순한 상식을 이번 쇼핑 실패를 통해 다시 배웠다. 그래도 비싼 돈 주고 산 거라 이번 달까지는 조심조심 입고 다니겠지만, 다음 봄에는 무조건 목부터 밑단까지 지퍼가 시원하게 달린 옷으로 다시 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