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에서 보던 헐렁한 프렌치 시크 스타일에 꽂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해외 스트리트 패션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파리의 가을 거리를 걷는 듯한 외국인들의 모습이었는데, 특별히 엄청나게 차려입은 것 같지도 않은데 묘하게 멋스러웠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에 헐렁한 여자셔츠 하나 걸치고, 바람에 찰랑거리는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그렇게 자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프렌치 시크’의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매일같이 빳빳하게 다려 입어야 하는 오피스룩이나, 아니면 아예 운동복처럼 편한 옷만 번갈아 입던 나에게 그 자연스러운 실루엣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도 저런 옷을 입으면 출근길이 조금은 덜 지루하고 스타일리시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으로 내가 가진 옷들과 매치할 만한 아이템들을 지르고 있었다.
8만 원대에 구매한 새틴스커트의 애매한 핏과 관리의 피곤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흐르는 듯한 질감의 하의였다. 백화점에서 실크 소재로 된 것을 보니 가격이 30만 원을 훌쩍 넘어가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타협점을 찾다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8만 9천 원짜리 폴리에스터 혼방 새틴스커트를 주문했다. 배송은 주말을 끼고 대략 사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얇은 비닐봉투를 뜯어보니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도는 스커트가 나왔다. 집에서 대충 입어봤을 때는 찰랑거리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발생했다. 얇은 새틴 소재다 보니 걸을 때마다 몸에 착착 감기는 정전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데 스커트가 다리 사이에 쩍쩍 붙어서 걸음걸이가 엉거주춤해졌다. 결국 급한 대로 근처 편의점에 들러 정전기 방지 스프레이를 사서 뿌려야 했다. 게다가 얇은 원단 탓에 주머니도 없고, 땀이 조금이라도 나면 땀자국이 그대로 비칠까 봐 하루 종일 엉덩이를 떼고 앉아 있는 등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앞후크브라까지 새로 사야 했던 얇은 셔츠의 제약
스커트 위에 매치하려고 샀던 루즈핏 여자셔츠도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을 연출하려면 얇고 찰랑거리는 면이나 린넨 혼방 소재여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안이 너무 잘 비쳤다. 평소에 입던 스킨톤 속옷을 입어도 등 뒤의 끈 라인이나 울퉁불퉁한 실루엣이 셔츠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쿨한 스타일을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속옷부터 엄청나게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결국 등 라인이 매끄럽게 떨어지는 앞후크브라를 따로 검색해서 구매해야 했다. 단추를 두 개쯤 풀고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리는 연출도 보기엔 쉬워 보였는데, 내가 하니 그냥 다림질을 까먹고 대충 구겨진 옷을 입고 나온 사람 같았다. 셔츠 깃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목이 휑해 보였고, 앞부분만 하의에 살짝 찔러 넣는 조절 작업만 거울 앞에서 5분 넘게 붙잡고 서 있었다.
아보아보 스타일과 대조되는 흘러내리는 핏의 현실
결혼식이나 격식 있는 자리에 갈 때는 아보아보(AVOUAVOU) 같은 브랜드의 딱 떨어지는 테일러드 재킷이나 원피스가 차라리 편하다. 원단이 단단하고 핏이 고정되어 있어서 입는 사람의 체형을 옷이 잡아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내추럴함을 표방하는 옷들은 옷 자체에 힘이 전혀 없다. 입는 사람의 자세나 체형이 그대로 겉으로 표현된다. 모델들이 골반을 슬쩍 틀고 서 있을 때는 그렇게 시크해 보이던 옷이, 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일을 하니 그냥 후줄근한 천 조각처럼 늘어졌다. 옷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내 몸의 단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꼴이었다. 게다가 의자에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새틴스커트 엉덩이 부분에 짙게 가로 주름이 생기는 걸 보며, 매번 스팀다리미로 달래가며 입어야 하는 이 옷들의 피곤함에 서서히 질리기 시작했다.
내추럴한 헤어를 위한 스크런치와 발마칸코트의 엇박자
머리 모양도 문제였다. 그냥 질끈 묶은 머리는 전혀 프렌치 느낌이 안 나길래, 실크 스크런치를 사서 대충 묶은 듯 잔머리를 내어보았다. 거울 앞에서는 괜찮아 보였던 그 잔머리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바람을 한 번 맞자마자 산발이 되었다. 지저분하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하느라 손가락으로 빗다 보니 오히려 머리가 더 엉클어졌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 위에 무심히 걸치려고 산 오버핏 발마칸코트도 내 체구에는 너무 벙벙했다. 코트 품이 넓다 보니 안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지하철 만원 버스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방에 깃이 쓸려 꺾이기 일쑤였다. 자연스러운 멋을 내려던 모든 시도들이 대중교통을 타는 일상 속에서는 그저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조커팬츠와 아웃도어신발로 돌아오며 느낀 해방감
결국 일주일쯤 그 귀찮은 착장들을 번갈아 입으며 버티다가, 월요일 아침에 모든 걸 내려놓았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여성조커팬츠를 꺼내 입고, 발바닥이 편한 아웃도어신발을 신었다. 거울을 보니 파리의 세련된 언니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그저 출근을 서두르는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 서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고, 정전기 때문에 옷을 털어내거나 치맛자락이 구겨질까 봐 의자 모서리에 걸터앉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옷장에 얌전히 걸려 있는 그 새틴스커트와 비치는 셔츠를 볼 때마다 예쁘긴 한데 손은 안 가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역시 남들이 대충 입은 것처럼 보이는 스타일은, 실제로는 대충 입어서는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 고도의 계산과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