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경종이 어떻게 죽었는지 한의대생과.araboza
* 주의 : 이글은 시험기간에 미쳐버린 한의대생이 쓴 글입니다. 전문성 따윈 1도 없습니다.
역사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한의학에 대해 0.1 그램 정도 밖에 모릅니다.
1. 경종 독살설의 기원
영화 사도에도 나온 경종 독살설. 그 내용은 세제였던 영조(당시 연잉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이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당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것을 최초로 유포한 사람은 경종의 처남이었던 심유현이었다.
그 흉언의 와굴과 근저는 바로 심유현(沈維賢)인데, 심유현은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아우였습니다.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14일
이를 토대로 영조 4년, 경종의 파벌이었던 소론과 남인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고, 이후에도 영조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2. 독살설의 핵심 내용
독살설의 핵심 내용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1) 영조가 1724년 8월 20일에 올린 게와 감때문이다. 게와 감은 서로 상극인데 이를같이 올렸다는 것이다.
2) 이후 경종의 증세가 악화되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전문가였던 영조는 인삼과 부자를 같이 올릴것을 명령했다.
3) 아니면.... 진짜 독을 썼을까?
이에대해 실록과 사료를 토대로 한의학적으로 바라보자.
3-1) 경종의 상태
우선 경종 이사람은 영조가 게와 감을 같이올린 8월 20일 이전에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발단은 7월 20일이었다.
“주상께서 약한 감기의 징후가 있어 근래 3일동안 밥도 먹지 않고, 잠도 못자며 두통이 있으시다고 말씀하셨다”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0일
이후 경종의 증세는 약한 감기에 멈추지 않고, 식사를 거부하고, 잠을 잘 못자며, 두통과 오한
열이나고 답답해하며 오심구토 또한 반복한다,(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3일)
이때 경종은 무려 30일 넘게 밥을 먹지 못하고 죽만 먹었었다(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0일)
즉, 경종은 이미 매우 아픈 상태였다는 것이다.
처방을 토대로 경종의 병을 추적해보자. 의관들은 7월 20일에 양격산에 황련을 더한 처방을 쓴다.(승정원일기)
양격산은 매우 찬 성질의 약이다. 안에 열이 많을때 찬약이란 찬 약을 다 때려넣은 약이다.
(참고로 한의학적으로 열을 끈다는 의미는 항염작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여기서 대황, 망초도 들어있는데 이는 대표적인 설사약이다.
아마 이때는 오한은 없고 가벼운 증상만 있었고,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경종은 비만이었다.
따라서 의관들은 “ 쎈 약으로 더 심해지기 잠재우자, 주상은 쎈약 써도 버틸거야”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종의 증세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수면과 두통문제는 개선되었지만 밥은 여전히 먹지 못했다.
그래서 의관들은 육화탕과 사군자탕+치자+사인을 처방한다.
사군자탕은 대표적인 보약으로 식욕 감퇴나 몸이 허할때 다른 처방에 합해서 많이 쓴다.
치자는 앞에서 말했듯, 이거도 열을 끄는 약인데 주로 상부의 열을 끌때 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육화탕인데, 육화탕은 토사곽란, 즉 계속 구토하고 설사하고 난리날때 쓰는 처방이다.
전형적인 식중독 증상이다. 실제로 경종은 매 여름마다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증상때문에 고생했는데
더운 여름에 하필이면 이인간이 어패류를 좋아하는지라 매번 식중독때문에 고생했나보다.
근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설사를 단순히 봐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옛날에 수액이 없던 시절에 설사는 매우 위중한 증상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장티푸스는 치사율이 50%에 육박할 정도였고
한의학의 바이블이라 부르는 상한론에도 “설사 위험해! 설사하면 죽어!”라는 이야기가 엄청 많이 나온다.
어쨌근 계속 승정원 일기를 쫓아가보자.
이후 경종은 열이 극심해져서 의관들은 시진탕을 처방한다.
시진탕의 시호는 해열작용이 있어서 중국에서도 불명열일 경우에 해열제와 같이 시호제를 많이 쓴다.
이후 열의 증세가 호전되자 승양산화탕, 진사익원산, 시령탕을 처방하는데 다 모두 찬 약이다.
현대에서 바라보는 우리나 당대의 의관들이나 경종은 식중독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필이면 이때는 가을이었는데(음력 7.8월이니깐 가을이다)
한여름하고 다를바 없을 정도로 몹시 더웠다고 한다(승정원일기 경종4년 7월 23일)
평소 어패류를 좋아하는 식습관 + 무더운 여름 콤보에 정신 못차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정리해보자면 경종은 장염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초기대처가 미흡했던 것이다.
3-2) 게와 감
당대에도 영조의 게와감에 대한 논쟁은 있었는지
영조가 자신의 저서(천의소감)와 실록에서 자신은 그날 음식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있다.
어쨌든 8월 20일에 영조가 게장과 감을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8월 20일에 경종은 증세가 매우 호전되어 진찰도 받지 않을 정도였다.
의외로 경종과 영조는 우애가 깊었는데 눈물 흘리며 찾아갔을 것이다.
“ 우리형... 다 나은거야? 형이 좋아하던 게야 맛있게 먹어!”
식중독 때문에 고생한 사람한테 게?
위생관념이 부족한 시절이었으니깐 그러려니 했겠지만 난리날건 불보듯 뻔하다. 게다가 이때는 엄청 더웠는데 말이다.
굳이 게장과 감의 상성관계를 떠나서 말이다.
(실제로 각종 의서에 게와 감은 같이먹으면 복통과 설사,구토를 유발한다고는 나와있긴 하다,
식중독이 일어나기 쉬운 게와 감의 탄닌의 콜라보는 환장할만 하다)
(‘凡柿同蟹食, 令人腹痛作瀉’ 二物俱寒也.‘- 본초강목, 不可與蟹同食, 令腹痛, 吐瀉 - 동의보감)
이후에 경종은 미친듯이 설사를 하게되고, 의관들은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총력전을 기울인다.
곽향정기산, 황금탕 등 설사를 멎게하는 처방은 다 쓰면서 말이다.
3-3) 인삼과 부자?
기록에 의하면 8월 23일부터 경종은 혼수상태에 빠지며
24일에 의관 이공윤이 계지마황탕을 올리나 차도가 없고 그날 저녁 영조가 갑자기
“내가 의술은 잘 모르지만 인삼과 부자가 좋은건 알고 있다” 라고 말하며 인삼과 부자를 같이 올린다.
이후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하다가 25일에 경종은 사망하고만다.
이때 의공윤이 반대 입장을 내리나 영조는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독성이 있는 부자를 왜 쓰냐! 이렇게 말하는데....
한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상황일때 부자를 많이 쓰라고 언급이 된다.
(물론 현대에서는 잘 안쓴다. 부자를 써야할 상황이면 큰병원 가라 그러지...부자의 독성때문에 의료분쟁에 휘말리기 쉽고
대부분 부자를 피하는 처방을 쓴다. 물론 부자를 쓰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은 진짜 명의이다.
오죽하면 부자를 잘쓰는 사람이 진짜 고수라는 말이 돈다)
부자의 하이겐아민은 강심효능이 있어서 심박수를 올리고 몸의 열을 내게한다.
인삼은 다들 잘 알겠지만, 원기를 보하는데 또다른 효능은 진액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사나 땀 등으로 체내 수분을 많이 잃었을때 인삼을 많이 쓴다.
의관 이공윤은 인삼을 쓸 것을 반대했지만, 설사로 진액을 많이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 혈압까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인삼과 부자를 쓰는 처방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이미 23일부터 경종에게 인삼은 계속 처방되고 있었다.
또한 계지마황탕에 마황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는 에페드린이 주성분으로 땀을 내는 처방인데
경종과 같이 혼수상태에다가 이미 설사로 체내 수분을 만이 잃어 탈수까지 왔는데 땀을 낸다?
그야말로 미친 생각이다.
그리고 이 위험성을 이공윤이 몰랐을리 없다. 한의학의 바이블인 상한론의 책 1/3 가까이가 마황을 잘못썼을때의 부작용을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이공윤 이사람 어의도 아니었다. 낙하산으로 들어온 외부의 초청인사 같은거였다.
영조가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죽이려고 했던 말이 아니라
“아니, 다른 어의들도 다 이게 맞다고 하고 내 상식선에서도 이게 맞는데 어의도 아닌 니가 감히? 그리고 너때문에 더 악화됐잖아!”
라고 하는것이다.
4) 3줄 요약
1- 경종은 죽기 한달전부터 장염때문에 고생했다.
2- 호전될 기미가 보이자 영조는 평소 좋아하던 게를 올렸다
3- 폭풍설사로 인해 탈수로 혼수상태가 왔는데, 이때 영조의처방은 틀린게 아니다. 오히려 의관이 잘못됐다.
결론을 확 내린 건 아니고 개별 사안에 대해 각기 평한 거네요
게와 감을 올린 건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준 거니 살수라기보단 실수이고